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저는 어김없이 군밤 생각이 납니다. 어릴 때부터 봐온 드럼통 화로, 까만 모자를 눌러쓴 군밤장수 아저씨, 그리고 손에 쥐어지던 따뜻한 종이봉투까지. 그런데 막상 군밤을 사먹거나 직접 구워보려 하면 생각보다 어려운 게 많더라고요. 왜 손에 검은 재가 묻는지, 왜 칼집을 넣는지, 어떻게 해야 타지 않고 속까지 잘 익는지. 저도 밤을 워낙 좋아해서 매년 챙겨 먹는 편인데, 제대로 알고 먹으니 더 맛있었습니다.
군밤이 찐 밤보다 더 달콤한 이유, 마야르 반응 때문입니다
집에서 쪄 먹는 밤도 맛있지만, 군밤은 확실히 결이 다릅니다. 찐 밤이 촉촉하고 부드러운 맛이라면, 군밤은 특유의 불맛과 훨씬 진한 단맛이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냥 굽는 방식의 차이겠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화학 반응이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밤을 열에 구우면 마야르 반응(Maillard reaction)이 일어납니다. 마야르 반응이란 식품 속 아미노산과 당분이 열을 받아 서로 결합하면서 색과 향, 맛이 복합적으로 변하는 반응으로, 빵을 구웠을 때 노릇노릇해지고 고소해지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밤 속에 풍부하게 들어있는 당류와 단백질이 이 반응을 거치면서 겉은 구수하게 갈변하고, 풍미는 한층 깊어집니다.
그런데 이 반응이 잘 일어나려면 불 조절이 중요합니다. 옛날 드럼통 군밤이 맛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는데, 달구어진 조약돌 위에 밤을 올리고 계속 굴려가며 구우면 자갈이 머금은 열기가 밤 속까지 일정하게 전달됩니다. 이를 복사열 전도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직접 불꽃에 닿지 않으면서도 내부까지 균일하게 익힐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직화로 구우면 겉이 먼저 타버리는 것과 확연히 다른 결과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또 하나, 길거리 군밤에 칼집이 들어가 있는 것도 그냥 편의를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밤은 수분 함량이 높고 껍질이 단단한 식품이라, 칼집 없이 굽게 되면 내부 수증기 압력이 급격히 올라가 껍질이 터질 수 있습니다. 이 압력 차이 때문에 칼집 하나가 안전과 맛 두 가지를 동시에 해결해 주는 셈입니다.
공주 군밤 축제에서 직접 구워본 화로 체험
올해 2월 공주에서 열린 군밤 축제를 찾았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평일이었는데도 공주 알밤 직거래 장터에 사람이 꽤 몰려있었거든요. '불타는 밤, 달콤한 공주'라는 슬로건답게 대형 화로에서 직접 밤을 구워 먹는 체험 부스가 축제의 중심이었습니다.
체험 방식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갔습니다. 1kg의 밤을 구매한 뒤 화로에 넣고 약 10분간 계속 굴려야 했는데, 껍질이 고르게 그을릴 정도로 부지런히 저어주는 것이 관건이었습니다. 멈추면 한쪽만 타고 속은 생으로 남게 됩니다. 인내심이 필요한 과정이었지만, 완성된 군밤을 까서 한 입 베어물었을 때의 만족감은 편의점 군밤과는 비교가 어려웠습니다.
직거래 장터에서는 원가네 햇촌농원, 마곡농원, 반촌 유경농산 등 여러 농가의 공주 알밤을 직접 시식하고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재래시장에서도 동그랗고 커다란 공주 알밤을 보면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운 편인데, 현장에서 농가별로 직접 비교하면서 고를 수 있다는 점이 특히 좋았습니다. 그중 공주 봉안농장의 알밤은 크기가 다른 것들보다 눈에 띄게 컸고, 단맛도 진했습니다. 실제로 2년 연속 직거래 매출 1위를 기록할 만큼 인지도가 있는 농가였습니다.
축제에서 맛볼 수 있는 간식들도 꽤 풍성했습니다. 밤을 활용한 식품 라인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토실이 알밤빵: 밤 알갱이가 통째로 들어간 빵
- 수제 폴라리스 젤라또: 공주 알밤과 쌀로 만든 아이스크림
- 천지인 알밤주 막걸리: 밤 향이 은은하게 배어있는 막걸리
- 공주 꿀밤호떡, 군밤식혜, 밤토실 공주 밤빵 등
그 자리에서 먹으니 더 맛있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밤이라는 단일 재료로 이렇게 많은 가공품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군밤이 겨울 간식으로 계속 사랑받는 이유, 영양소에 있습니다
밤이 맛있다는 건 다들 알지만, 영양적으로도 꽤 충실한 식품이라는 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밤을 즐겨 먹으면서도 그냥 맛있으니까 먹는 거였는데, 알고 보니 한의학에서 과일과 견과류의 장점을 모두 갖춘 식재료로 분류할 만큼 영양 밀도가 높은 식품이었습니다.
밤에는 비타민 C 함량이 상당히 높은데, 비타민 C는 항산화 작용(Antioxidant activity)을 하는 영양소입니다. 항산화 작용이란 세포를 산화시키는 유해 물질인 활성산소를 억제해 세포 손상을 막는 기능으로, 면역력 증진과 감기 예방에 직접적으로 관여합니다. 보통 비타민 C는 열에 약해 조리 과정에서 많이 파괴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밤의 경우 굽거나 쪄도 영양소 손실이 크지 않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또한 밤은 탄수화물, 식이섬유, 비타민 B군이 고루 들어있어 에너지 대사를 도와줍니다.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자료에 따르면 밤 100g당 열량은 약 162kcal로, 다른 견과류에 비해 지방 함량이 낮고 전분이 풍부해 소화 흡수가 용이한 편입니다(출처: 농촌진흥청).
최근에는 길거리 드럼통 대신 전동으로 회전하는 현대식 군밤 기계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열원과 회전 방식이 자동화되어 일정한 품질의 군밤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인데, 조약돌의 복사열을 재현하는 원리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맛의 본질은 유지되는 셈입니다. 포장 가공 군밤 시장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어, 식품의약품안전처 기준에 맞춰 위생 처리 및 질소 충전 포장을 거친 제품들이 편의점과 마트에서 연중 판매되고 있습니다(출처: 식품의약품안전처).
군밤을 즐기는 방식도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다음으로 시도해보려는 건 에어프라이어 군밤인데, 열풍 순환 방식이 달구어진 자갈의 열 전도 원리와 비슷하게 작동한다고 해서 기대가 됩니다. 직접 연습 삼아 만들어보고 결과를 공유해 볼 생각입니다.
밤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내년 2월 공주 군밤 축제 일정을 한 번 눈여겨보시길 권합니다. 직접 화로 앞에서 밤을 굴려보는 경험은 편의점 군밤 봉지를 뜯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맛이 납니다. 손에 검은 재가 좀 묻더라도, 그걸 닦아내며 까먹는 재미가 군밤의 진짜 매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