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커피 한 잔 없으면 하루가 시작이 안 되는 분, 저만 그런 건 아니죠? 저도 매일 커피는 꼭 한 잔은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데요. 2년 전 강릉 여행에서 테라로사를 직접 가보고 나서야 "왜 사람들이 커피 마시러 강릉까지 가냐"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단순한 카페 여행이 아니라, 한국 커피 문화가 어떻게 뿌리내렸는지 그 흐름이 강릉에 고스란히 담겨 있더라고요.
강릉이 커피 성지가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강릉이 처음부터 커피로 유명한 도시였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사실 지금의 안목해변은 화려한 카페 거리로 가득하지만, 1980~90년대만 해도 이곳은 길거리 자판기가 수십 대씩 늘어선 한적한 해변이었습니다. 택시 기사들의 쉼터였고, 여행 온 젊은이들이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바다를 바라보던 곳이었죠. 재미있는 건 자판기마다 커피, 프림, 설탕 비율이 달랐는데 그 중에서도 유독 줄이 긴 인기 자판기가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이미 강릉 사람들은 커피 맛에 꽤 예민했던 것 같습니다.
이 도시가 본격적인 커피 성지로 자리 잡는 데는 두 사람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한국 핸드드립 커피의 1세대 거장인 박이추 명장이 강릉에 '보헤미안'을 열면서 전국의 커피 매니아들이 강릉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이후 대기업 출신의 김용덕 대표가 2002년 '테라로사'를 열면서 대형 커피 로스터리 문화를 강릉에 뿌리내렸습니다. 로스터리(Roastery)란 단순히 커피를 파는 공간이 아니라 원두를 직접 볶는 설비를 갖추고 생산부터 판매까지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커피 전문 시설을 말합니다. 제가 직접 가본 테라로사도 그 규모와 분위기가 카페라기보다는 하나의 커피 공장에 가까웠습니다.
박이추 명장의 철학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그는 먼 길을 찾아온 손님을 위해 지금도 직접 모든 커피를 추출하는 원칙을 고수합니다. 그리고 맛에 대한 평가는 오롯이 손님의 몫이라고 말하는데, 이 단순한 한 마디가 제게는 꽤 오래 남더라고요. 커피를 음료가 아니라 작품으로 대한다는 태도, 그 태도가 강릉 커피 문화 전반에 흘러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핸드드립과 머신 커피의 차이도 짚고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에스프레소 머신은 고압(High Pressure)으로 원두 속 커피 오일 성분을 강제 추출하는 방식인데, 여기서 커피 오일이란 원두에 포함된 지용성 성분으로 물에는 잘 녹지 않아 기계 압력을 통해야만 뽑아낼 수 있는 물질입니다. 이 성분 덕분에 에스프레소 특유의 진하고 묵직한 질감이 생기는 것이고요. 반면 핸드드립은 사람이 직접 물의 온도와 속도를 조절하며 커피 본연의 맑은 향미를 이끌어내는 방식입니다. 같은 원두라도 전혀 다른 맛의 커피가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강릉시는 2009년부터 매년 가을 '강릉커피축제'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국내 지자체 최초로 시작한 이 행사는 전국 각지의 바리스타들이 모여 경연을 펼치고, 일반 시민들도 다양한 커피 체험에 참여할 수 있는 도시 단위의 커피 문화 행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출처: 강릉시청).
- 안목해변: 1980~90년대 자판기 커피 거리 → 현재 개성 있는 카페 밀집 지역으로 탈바꿈
- 보헤미안(박이추 명장): 한국 핸드드립 1세대 문화를 강릉에 정착시킨 출발점
- 테라로사(김용덕 대표): 2002년 개업, 대형 로스터리 카페 문화의 선구자
- 강릉커피축제: 2009년부터 매년 가을 개최, 국내 지자체 최초
직접 가보니 알게 된 강릉 커피 문화의 깊이
솔직히 테라로사를 처음 갔을 때는 '유명하다니까 한번 가보자' 하는 정도의 기대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들어서는 순간, 공간 자체가 달랐습니다. 대형 로스팅 설비가 눈앞에 펼쳐지고, 커피 볶는 냄새가 공간 전체에 배어 있는데, 그 분위기가 카페인지 공장인지 헷갈릴 정도였어요. 그리고 마셔본 커피 맛이, 왜 사람들이 강릉까지 오는지 제대로 납득이 가는 수준이었습니다.
커피 맛을 결정하는 데 로스팅(Roasting) 공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이때 처음 제대로 이해했는데요. 로스팅이란 생두에 열을 가해 커피 특유의 향미 성분을 끌어내는 원두 가공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까다로운 것은 원두 겉면과 내부의 색상 격차, 즉 로스팅 균일도를 유지하는 일입니다. 격차가 벌어지면 겉은 타고 속은 덜 익는 상태가 되어 커피 맛이 불균형해지거든요. 자동화 기계를 써도 눈을 뗄 수 없는 작업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셈입니다.
강릉 커피 문화에서 또 하나 제가 인상 깊게 본 건, 체험형 프로그램의 존재였습니다. 강릉에는 커피나무를 직접 재배하는 농장이 있고, 일반인들도 생두를 직접 볶고 추출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커피나무는 흔히 열대 지역의 식물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아프리카 원산지에서도 고원지대나 그늘진 환경을 선호하는 식물이라 적절한 환경 관리가 이루어지면 국내에서도 재배가 가능합니다. 이런 사실이 커피 산지를 직접 경험한다는 느낌과 맞물려, 단순한 카페 투어 이상의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또 강릉에는 54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노포 다방들도 남아 있습니다. 달걀 노른자를 띄운 전통 커피가 한때 수많은 단골들의 일상이었다는 이야기, 제 경험상 이런 공간은 단순히 '오래된 카페'가 아닙니다. 젊은 감성의 세련된 카페와는 전혀 다른 결의 이야기가 담긴 장소인 거죠. 강릉에 간다면 안목해변의 카페만 아니라 이런 오래된 다방 한 곳은 꼭 들려보시길 권합니다.
최근에는 강릉 커피가 오리지널 드립 커피 영역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고소하고 걸쭉한 흑임자 크림을 올린 흑임자라떼, 강릉의 명물인 초당 옥수수를 활용한 초당옥수수커피처럼 강릉 고유의 식재료와 커피를 결합한 시그니처 메뉴들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커피빵처럼 커피를 응용한 베이커리까지 강릉의 커피 문화로 자연스럽게 편입되었고요. 커피 한 잔에 지역 문화가 담기는 이 흐름이, 개인적으로는 강릉이 단순한 커피 소비 도시가 아니라 커피 문화를 만들어가는 도시라는 증거로 보입니다.
- 흑임자라떼: 고소하고 걸쭉한 흑임자 크림을 올린 강릉 시그니처 커피 메뉴
- 초당옥수수커피: 강릉 명물 초당 옥수수 크림을 활용한 달콤하고 구수한 커피
- 커피 체험 농장: 생두 로스팅과 추출을 직접 경험하며 커피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교육 공간
- 전통 다방: 54년 이상 명맥을 이어온 노포, 달걀 노른자 커피 등 다방 문화의 흔적
올 여름 휴가지로 다시 강릉을 선택했습니다. 이번에는 테라로사 재방문은 물론이고, 안목해변을 따라 걸으며 아직 못 가본 카페들, 그리고 흑임자라떼나 초당옥수수커피 같은 로컬 시그니처 메뉴들도 직접 맛볼 예정입니다. 박이추 명장의 보헤미안도 이번엔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매일 마시는 커피 한 잔이 일상의 루틴이라면, 강릉은 그 루틴에 조금 다른 깊이를 얹어주는 곳입니다. 커피가 어디서 시작해서 어떻게 한 잔이 되는지를 도시 전체로 경험할 수 있는 곳, 커피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한 번쯤 직접 확인해보시길 권합니다.